‘용순(2017)’은 열여섯 살 여고생의 일상과 감정을 세밀하게 그려낸 한국 독립영화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학원물이지만, 그 속에는 사춘기 소녀의 내면과 주변 어른들과의 관계, 상실의 아픔, 존재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는 섬세한 성장 드라마입니다. 화려한 연출이나 큰 사건 없이도 강한 공감과 여운을 남기는 이 영화는, 사춘기를 겪는 10대뿐 아니라 그 시절을 지나온 모든 이들에게 위로와 성찰을 안겨줍니다. 본문에서는 ‘용순’이 단순한 학원 영화가 아닌 10대의 복잡한 감정과 상처, 그리고 성장을 그린 작품으로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깊이 있게 살펴보겠습니다.
명랑하지만 무거운, 용순이라는 소녀의 성장
〈용순〉은 14살 소녀가 겪는 감정과 관계의 흔들림을 무겁지 않게, 그러나 절대 가볍지도 않게 그려낸 작품입니다. 주인공 용순은 겉보기에는 털털하고 명랑한 아이입니다. 친구들과 장난을 치고, 체육 시간에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뛰어다니며, 말도 툭툭 내뱉는 ‘요즘 아이’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런 명랑함 뒤에는 성장기의 혼란과 상실, 그리고 감정의 무게가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특히 어머니의 죽음을 겪은 이후, 용순은 세상에 대해 경계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런 내면은 때로 반항으로, 때로는 무심함으로 표출됩니다.
사춘기의 아이들이 자주 그렇듯, 용순도 스스로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그것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명확히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몸은 변하고, 감정은 이전과 다르게 복잡해지면서, 그녀는 자신의 삶과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새롭게 마주하게 됩니다. 영화는 이런 복잡한 심리를 과하게 설명하지 않고, 조용히 따라가며 보여줍니다. 오히려 말 없는 장면, 어색한 눈빛 교환,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그녀의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나옵니다. 이 점이 바로 〈용순〉이 가진 섬세함이자, 관객에게 울림을 주는 방식입니다.
용순의 성장은 외부로 드러나는 사건보다는, 그녀의 내면에서 서서히 자라나는 인식의 변화에서 비롯됩니다. 선생님에 대한 막연한 호감, 친구들과의 다툼과 화해, 그리고 가정 안에서의 갈등은 모두 용순이 ‘어린아이’에서 ‘스스로 생각하는 존재’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물론 이 변화는 결코 매끄럽거나 아름답지만은 않습니다. 때로는 불편하고, 낯설고,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순간이 용순에게는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속 아주 중요한 ‘조각’들이 되는 셈입니다.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누구나 겪지만 쉽게 말하지 못하는 사춘기 소녀의 감정을 아주 솔직하게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웃으며 넘어가는 장면 속에서도 그 웃음이 꼭 즐거움만은 아닐 수 있다는 걸 영화는 잘 알고 있고, 관객에게도 그 사실을 조용히 전달합니다. 그래서 영화가 끝나고 나면, 용순이라는 인물이 단순한 캐릭터가 아니라, 어느 시절의 ‘나’였거나 혹은 ‘내가 지나쳐왔던 누군가’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좋아한다’는 감정의 무게속 고민
〈용순〉에서 가장 큰 파장을 일으키는 감정은 단연 ‘좋아한다’는 감정입니다. 용순은 담임 선생님을 좋아하게 되면서 복잡한 감정을 마주하게 됩니다. 아직은 어린 소녀이지만, 그 감정만큼은 누구보다도 진지합니다. 그녀는 그 감정을 혼자서 끌어안고 고민하며, 어떻게든 그것을 표현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상대는 어른이고, 선생님이며, 분명 선을 지켜야 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 감정은 순수하지만, 동시에 불편하고, 어떤 측면에서는 위험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영화는 이 민감한 감정을 자극적으로 그리지 않고, 오히려 조심스럽게 다루며, 관객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좋아하는 마음은 왜 때로는 짐이 될까?’라는 물음이죠. 용순은 그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때로는 무작정 표현하고, 때로는 상대의 반응에 실망하며 자존심도 상합니다. 그녀의 감정은 어른의 시선에서 보면 철없고 미성숙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 감정 안에 담긴 진심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용순은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고, 관계란 무엇인지, 감정의 무게를 감당하는 법을 서서히 배워나갑니다.
이 감정의 혼란은 단순히 ‘짝사랑’이라는 말로 정리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성장의 일부이고, 어쩌면 자기 자신을 가장 먼저 좋아하고, 이해하게 되는 시작점이기도 합니다. 선생님의 단호한 거절은 그녀에게 상처가 되지만, 동시에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조금 더 깊게 만들어 줍니다. 감정을 고백하는 일, 감정을 받아들이는 일, 감정을 정리하는 일—이 모든 과정이 용순에게는 매우 중요한 경험으로 남습니다.
〈용순〉은 좋아한다는 감정이 꼭 이루어져야만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때로는 그 감정을 통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고, 무엇을 감당할 수 있는지 시험해보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영화 속 용순은 아프지만, 분명히 성장합니다. 그녀가 겪는 감정의 무게는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경험했던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관객은 그녀의 혼란과 눈물, 조용한 결심을 지켜보며, 자신 안의 오래된 감정들을 꺼내어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말합니다. “좋아한다는 마음, 그 자체로도 충분히 의미 있다”고 말해줍니다.
상처는 있지만 끝은 따뜻한 위로를 주는 영화
‘용순’은 전체적으로 무겁고 조용한 분위기를 갖고 있지만, 결코 암울하거나 절망적인 영화는 아닙니다. 오히려 영화는 작고 일상적인 순간들 속에서 치유와 위로의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용순은 엄마에 대한 상실감, 선생님에 대한 감정의 좌절, 친구들과의 갈등 등을 겪으며 조금씩 달라집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감정을 누구에게도 표현하지 못했던 아이가, 후반부로 갈수록 조심스럽게 감정을 말로 꺼내기 시작합니다. 특히 아빠와의 관계가 서서히 회복되는 장면은 이 영화의 정서적 정점을 이룹니다. 말수 없고 무뚝뚝하던 아빠가 용순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가는 순간, 관객도 모르게 가슴이 따뜻해지는 감정을 경험하게 됩니다. ‘용순’은 사춘기를 그리는 영화지만, 그 안에는 어른도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이 가득합니다. 단순히 ‘문제아’로 치부되는 아이가 아니라, 감정을 해석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을 뿐인 성장 중의 존재라는 메시지는 우리 사회가 청소년을 바라보는 방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영화 ‘용순’은 특정한 사건이 있는 것도, 큰 갈등 구조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강하게 남는 이유는, 그 안에 우리 모두가 지나온 감정의 풍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나 있었던 혼란의 시기, 감정을 말로 설명하지 못하던 시절, 그저 웃거나 짜증 내며 자신의 상처를 감추던 순간들이 ‘용순’의 모습과 겹쳐집니다. 이 영화는 사춘기를 통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공감과 위로를, 이미 지나온 사람들에게는 회상과 이해를, 그리고 아이를 키우는 부모나 어른들에게는 다시 돌아봐야 할 시선을 전해주는 작품입니다. 단순 학원물이 아닌, 성장의 깊이를 담은 영화 ‘용순’을 지금 이 시기에 다시 꺼내보길 권합니다.